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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by 레오파파 2024.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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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은 어린 시절의 기쁨과 무한한 가능성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특별한 날은 어린이들의 희망차고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우리 어린이들이 티 없이 맑고 바르며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는 의미에서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 어린이날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에 놀러를 가야 할 것 같은 그런 의무감(?)이 드는 날로 점점 변질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어린이날 역사를 한번 되짚어 보면서 진정한 어린이날의 참된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어린이날 

1919년에 3.1 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진주를 시작으로 각 지역에 소년회가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토요대학 아동미술과에 입학한 방정환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눈을 뜨고 1921년 김기전, 이정호 등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펼쳤다. 그러고는 아이를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어린이'라는 낱말은 없었고 애기, 어린것, 아이들, 애들, 사내아이, 계집애 등으로 불렸음.)

이후 1922년 4월 각 소년운동 단체, 신문사 등이 모여 논의한 결과 어린이날은 ‘새싹이 돋아난다’는 의미로 새싹이 돋아나는 5월 1일을 어린이날(소년일)로 정하고 그 해에 천도교소년회에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였다.
 
이듬해(1923년) 3월 16일 소파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이 소년운동 활성화를 돕고자 일본 도쿄에서 색동회를 발족하였고, 같은 달에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했다. 4월 17일에는 색동회는 각 소년운동 단체들을 조직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만들었다.
 
1923년 5월 1일 색동회 창립과 동시에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기념행사의 표어는 "희망을 살리자, 내일을 살리자",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였으며, 어린이가 미래의 희망임을 강조하였다. 기념식 후 200명의 소년들이 경성 시내를 4 구역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였다. 어린이날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어린이 운동가들은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 하는 구호를 외치며 아이들의 가장 간절한 희망사항 10가지를 담은 '어른에게 드리는 선전문'을 배포했는데, 그 속에는 '이발이나 목욕을 때맞춰 해 주세요',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해주세요', '산보와 소풍을 가끔 시켜주세요' 같은 것도 있었다. 이런 외침도 어린이날만 지나면 잠잠해졌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아동 인권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이후로 어린이날은 전국에서 열리는 기념행사로 발전했다. 초창기에는 잔칫날이라기보다는 어른들에게 어린이날 및 어린이도 인격을 갖고 있음을 알리는 날이었다. 전국 거리를 행진하면서 전단지 등을 나눠주는 일을 어린이들이 했는데, 1925년 행사에는 전국에서 약 30만 명의 어린이들이 참가하여 길거리에 나갔고, 1933년 어린이날에 소년단 소속 어린이들은 새벽 6시부터 어린이날을 고하는 새벽나팔을 분 뒤, 선전지 배포에 총동원됐다고 한다.
 
5월 1일은 노동절과 겹쳤기 때문에 1927년부터는 좀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어린이날 행사를 5월 첫째 일요일에 열었다. 이때 동화와 동요 대회, 미술 전람회 등 어린이들이 직접 참가하거나 관람할 수 있는 행사들이 많이 열렸다.
 
어린이날이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지자 어린이 운동이나 어린이날 행사가 민족의식을 높일 것을 염려한 일제는 1934년에 《어린이》를 폐간시키고 1937년에 소년단체 해산명령을 내려 어린이날 행사도 금지시켰다. 어린이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학교에서 수업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어린이날은 1939년부터 중단되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살리기 위해 《어린이》가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의해 어린이날도 부활했다.
 
해방 이후 첫 기념식은 1946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인 5월 5일 오전 11시부터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어린이날 전국준비위원회와 어린이날 서울시준비위원회 공동 주최로 거행되었는데, 천도교소년회, 조선소년운동중앙협의회 등 18개 소년 단체에서 수천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4명의 남녀 어린이가 다시는 집도 말도 빼앗기지 않고 새날 새 조선의 주인으로서 열심히 배우겠다는 「소년소녀의 선서문」을 낭독했다.
 
해방 뒤 첫 어린이날인 1946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이 5월 5일이었는데, 날짜가 달라지는 불편을 막기 위해 1946년 이후로는 요일에 관계없이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고, 이 날짜가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광복 이후 1970년대 이전까지의 어린이날 행사는 한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1970년에 어린이날이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5037호)에 따라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어린이날 행사가 활발해졌다. 이후 어린이날은 1973년 3월에는 법정기념일로, 1975년 1월에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81년에 아동복지법을 개정하면서 '어린이를 옳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하여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한다'는 조문을 포함하였다. 이로써 어린이날이 개별법에 반영되며 오늘날에 이른다.

출처_나무위키 '어린이날'

 

@ Comments..

40대인 나의 어린이날 추억은 부산 사직야구장에 가서 각종 시범 공연(?)을 봤었던 게 제일 추억에 남는다.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사직구장 마운드에 착지하는 멋진 군인 아저씨들의 낙하시범, 소방대원 아저씨들의 화재진압 시범, 군인&경찰 아저씨들의 무술, 격파시범 등등 가족과 함께 어린이날 행사를 참여하고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었던 기억이 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심심한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그게 최고의 이벤트였다.

 

나도 아이가 있지만 매년 이런 이벤트가 있는 날이면 아이에게 어떤 추억을 선물해 줄까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세이브 더칠드런 이란 어린이지원 단체에서 주최하는 마라톤 행사 참여다. 아이가 제법 달릴 수 있을 때부터 참여하여 올해까지 3번째 참여신청을 하였다. 참가비는 기부를 통하여 전액 전 세계 아이들을 위하여 사용되는 뜻깊은 어린이날 이벤트이다. 매달 이 단체를 통해서 소정의 기부를 하고 있지만 이렇게 연례행사로 큰 이벤트에는 정말 좋은 마음으로 참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뜻깊은 어린이날 행사가 나의 아이에게도 어린이날이 그냥 선물 받는 날이 아닌 어린이들의 인권과 행복을 위한 날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작년에는 광안리 바닷가 주변을 4km 뛰었었는데 비가 오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바닷가 쓰레기 줍는 작은 이벤트부터 시작해서 포기하지 않고 중간중간 미션을 수행하며 끝까지 완주를 했을 때의 그 성취감까지, 새싹처럼 자라나는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되는 행사였다. 찾아보면 이런 뜻깊은 행사들이  많이 있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가 행복하고 밝고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이번 어린이날에는 선물 사주고 외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닌 어린이날의 참된 의미를 알려줄 수 있는 이런 행사에 참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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